세계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얘기가 있습니.

그것도 올해(2012) 가 다 가기전, 12 21일에 그렇게 될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근거로 삼는 것중 하나가 마야의 달력입니다.마야문명은 고도로 발달한 수학체계와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달력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가장 권위있는 마야의 달력 원판중 하나가 드레스덴의 주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일명 드레스덴코덱스로 불리는 이 마야의 달력은 125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날짜 계산을2012 12 21일로 끝맺고 있습니다(News 2012 3 15일자 참조). 이런 사실을 근거로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종말 싯점을 마야 달력이 끝나는 올해12 21일로 주장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종말론에 회의적인 시각입니다. 극단적인 세계 종말에 관한 견해는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었던 마야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견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종말이론은 마야인들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선적 시간관에 익숙해 있고 세상의 종말에 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구 사람들의 잘못된 자의적인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야문명의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순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야의 달력이 끝나는2012 12 21일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순환주기의 끝을 의미하며 동시에 다른 순환주기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이러한 사실은 최근에 미국의 고고학 팀이 드레스덴코덱스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후 약900여년 경) 마야의 또 다른 달력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더 확실하게 증명되었는데, 이 달력은 드레스덴코덱스보다 더 멀리 약 7000년 이후의 시간까지도 계산하고 있습니다(Die Welt 2012 5 16일자 참조). 이로써 마야의 달력에 근거한 세계 종말에 대한 이론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아직도 상황은 별로 나아진것 같지가 않아 보입니다. 세계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혹시나 진짜 곧 세계 종말이 도래하는 것은 아닐까라며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그들은 갑자기 자신에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 대해서 미리 대비하고 싶어합니다. 자신들의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을 기정사실로 규정하고 그것을 뒷받침 해줄 근거를 여기저기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 종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스트레스를 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세계의 종말과 관계가 없는 마야의 달력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도 이러한 인간의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세계가 올해 연말에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대중의 심리적 상태와 관심은 기업들과 광고주들에게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아이템들이 앞다투어 출시되고 있습니다. 건축에서는 노아의 방주를 닮은 건물이 등장하는가하면 종말을 주제로 한 책과 영화와 상품들도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계 종말을 두려워하는 동안 어떤이들은 그 두려움을 적극 마케팅에 활용해 돈을 벌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심리적 요인이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종말에 대한 관심을 갖게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 종말에 대한 소문에 관심을 갖게 되는 현상은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사회적 기반을 위협하는 불안요소들이 점점 커질 때, 자연재해로 인한 막대한 피해나 경제의 위기, 전쟁을 통한 생존의 위협등이 극대화 될 때에 세계 종말에 관한 예언들은 어김없이 수면위로 떠올라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기존 권위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커지고,불합리한 사회 구조속에서 괴로움 당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세계종말에 대한 예언들은 어김없이 등장해 사람들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유럽의 역사나 한국의 역사속에서도 이런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로마로부터 조직적인 박해가 심해져 많은 기독교인이 억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초대교회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페스트가 창궐하고 흉년으로 배고픔에 시달리며 엄청난 세금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던 중세의 유럽 사회에서도 세계 종말은 이슈가 되었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일제의 강점기 아래 고통당하던 한국의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국민들이 온갖 위협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위한 저항을 이어갔던 1980년대 90년대에도 세계종말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유럽이나 아메리카나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세계 종말에 대한 예언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만약 이루어졌더라면 필자가 이런 글을 지금 쓰고 있지도 못할테니까요.

 역사속에서 해프닝으로 끝난 세계 종말의 예언들을 몇가지 추려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교황 실베스터 2세는 999 12 31일에 세계의 종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럽사회는 곧 극도의 스트레스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1524년에는 많은 천문학자들이 그해 2 1일에 세계가 종말을 고한다고 내다봤습니다. 2만여명의 런던시민들은 종말의 순간에 좀더 하나님과 가까이 있고자 앞다투어 높은 언덕으로 피신했습니다.

1963년에는 소수 종파의 종교인들이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믿고, 재림하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진 몽블랑 산(높이 4,810.45 m,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수천 명이 산악 열차를 타고 산에 올라가 추위에 떨며3일 동안이나 세상의 종말을 간절하게 기도하며 준비했지만 아무일이 없자 허탈하게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들중에 많은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전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정리하거나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 개신교 교단의 목사였던 이장림은1992 10 28일 예수님이 공중에서 재림하실 것이라며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미 80년대부터 다미선교회를 만들어 세계의 종말을 준비하라고 가르쳤고,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업과 일상을 포기하고 오로지 휴거(구원받은 영혼들만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감)에 참여하기 위해 선교활동과 집단생활에 몰두하였습니다. 나중에 이장림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서 막대한 금액의 재림 준비용 헌금을 받아 이중에 34억여원을 착복해서 구속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날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시 주어진 일상을 회복하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1999년을 세계 종말의 해로 보았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약된 세계의 종말도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물리학자 이삭 뉴턴은 2060년에 세계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세계 종말에 대한 예언들은 등장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속에서 고통과 어려움이 없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없었던 시간이 있었나요? 피말리는 경쟁이 없었던 시간은 존재했었던가요? 빈부의 격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두가 완전한 평등을 누렸던 적은? 범죄와 경제 불안과 자연재해가 아침햇살 만난 안개처럼 스르르 사라진 적은? 질병이 사라져 더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쭉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이런 위협과 불안한 요소들 속에서 몸부림치며 역사를 이끌어 왔습니다. 앞으로도 극단적 세계 종말에 대한 소문들은 이미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종 고개를 들고 찾아와 우리를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마다 매번 두려움에 떨면서 일상을 포기한 채 높은 산으로 달려가거나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짓는데 시간과 재능을 투자해야 하는 걸까요?

 

세계의 종말과 관련하여서 역사상 신약의 요한계시록(묵시록)만큼 많은 오해와 억측을 낳은 성경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심했던 시절에 박해당하던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이 묵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동시에 강조되고 있습니다. 불합리하고 죄악이 판치는 이 세상의 질서가 곧 저물게 되리라는 경고와 함께 신적인 평화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이 요한계시록이 들려주는 메세지입니다. 박해속에서 고통당하던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이 메세지를 통해 어려운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위로와 희망을 공급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요한 계시록은 엄중한 경고와 함께 위로와 희망을 동시에 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묵시는 이 현실세계의 엄청난 소란을 밝히 드러내는 동시에 또한 세상을 향한 엄청난 구원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있는 내용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세계의 종말과 파괴의 싯점을 계산해 내고 멸망의 징조와 형태들을 추론해 내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추구하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묵시문학과 오늘날의 극단적 세계 종말에 대한 예언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기독교 묵시문학이 두려움과 희망을 균형있게 다루고 있는 반면, 극단적 세계 종말론은 두려움과 절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묵시문학이 암울한 현실을 통과하여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말할 때, 극단적 세계종말에 대한 이론들은 묵시의 어두운 측면만을 부각시켜 멸망을 말하고 두려움을 갖게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이 세상의 폐기가 아닌 완성이며, 다함께 당하는 파멸이 아니라, 더불어 누리는 회복입니다.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 종말입니다.

 

신학(Theologie)이라는 학문의 본연의 임무는 자연과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한 상황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서 어떤 다른 돌파구를 찾게해 주거나 신기루 같은 생명보장의 이론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바르게 인지하고 진지하게 받아 들이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은 이 세상이 여전히 지금처럼 영원할 것이라고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예언자들이나 영지주의자들처럼 세상의 가치를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회복이 힘들정도로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위협속에서도 이 세상을 끊임없이 긍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비로우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할 수 없고 배반당하지도 않을 그런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지라도 나는 오늘 나의 어린 사과나무를 심겠다.’(Und wenn ich sicher wü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 würde ich doch heute mein Apfelbäumchen pflanzen.)라는 문구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기 머물렀던 독일 아이제나흐의 2층집 앞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와 함께.

한국에서는 스피노자의 명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보다 100여년 앞서 청년루터가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한 내용입니다. 루터가 살았던 시절도 페스트가 창궐해 많은 사람이 죽고, 종교는 부패했으며,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고통받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세계 종말에 대한 거짓 예언들이 그 틈을 비집고 파고들어 민심을 흉흉케 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포기할 수 없고 배반당하지도 않을 희망을 그는 붙잡았습니다.

 

세계의 종말이란 단어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과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이 계시다면, 사랑하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요한일서4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쉬운성경)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4 7-8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침착하십시오. 그리고 정신을 차려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어 줍니다.«(쉬운성경)

 

이제는 더이상 근거없는 허황된 종말론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시간에 더 열심히 사랑하고 이웃을 돌아보는 행복한 선택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이제 두려움을 걷어내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발콘에 있는 화분을 손보러 갑시다. 사랑하는 벗들과 함께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세상 사는 맛을 느껴도 봅시다. 일상이 긍정되고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극단적 세상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설자리를 잃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종말에 대한 소문이 들릴 때면 그 소문을 통해 전해오는 더 깊은 소리, 바로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고통당하는 자연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더 사랑해야 할 때가 된것이구나그렇게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사랑하며, 돌아보지 못했던 이웃에게 더 마음을 쓰고 사회의 약자들에게 더 관심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개선의 의지를 더 견고히 해야겠습니다. 한 순간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주 야훼의 사랑 다함 없고 그 자비 가실 줄 몰라라. 그 사랑, 그 자비 아침마다 새롭고 그 신실하심 그지없어라. « (예레이야 애가3, 22-23공동번역)

 

20121120일 삼위일체주일후 스물네번째 주 화요일,

김효태 목사(비인정동교회 담임목사)

 

 

* 이 칼럼은 재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지 통권 51호(2012년 겨울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