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세계 여행가들이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도시가 직선과 곡선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실제 다녀보면 로마나 파리에서 보는 고전적인 모습보다는 현대적 감각이 뛰어나 정말 이런 도시가 세상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서울 올림픽에 이어 1992년 올림픽을 개최한 바르셀로나는 황영조의 빛나는 마라톤 금메달로 인해 우리와 인연이 깊다. 실제로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길을 보고난 후에는 더욱 그의 끈질긴 모습이, 특히 그 때까지 1등으로 달리던 일본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다는 것이 한국인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여왕의 후원을 얻어 1492년 신대륙 발견을 향해 떠난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이다. 1800년까지 인구 10만정도의 도시가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과 쿠바 등 식민지 경영으로 인해 1900년에는 5배인 50만이 되었고, 현재는 250만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1900년 전에 이미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도시인구로 인해, 바르셀로나는 옛도시를 제외한 시 전체에 도시 계획을 실행하여 모든 길을 가로 세로 133m의 정방형으로 나누어 구역을 정하였다. 사방 400m에 9개의 구역이 들어가도록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건물 높이도 5~6층 정도로 제한하였다. 그래서 하늘에서 보면 바르셀로나는 도시 일부가 정말 바둑판과 같이 보인다. 길이 좁기 때문에 90%의 길이 일방통행으로 되어 있다. 길도 보도가 더 넓어 정말 인간을 더 먼저 생각하고, 자동차는 나중에 생각하는 생활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도시에 기인이 나타났다. 1852년 그는 바르셀로나 남쪽 따라고나에서 출생하였으며, 대장간을 경영하는 가난한 아버지를 두었으나, 집과 밭을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키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으로 바르셀로나에서 건축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미 대학시절부터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머리속에 그리기 시작하여 친구들과 교수들의 따돌림을 받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차린 후원자를 만나 그는 그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결국 그의 건축 작품들 대부분이 UNESCO World Heritage Site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그가 바로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 1852-1926)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외로운 천재였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사람들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초기 대표작인 Palau Guell은 굵은 철조물을 엿가락처럼 휘어 만든 아름다운 조형물과 동화 속에 나올만한 굴뚝과 내부 구조는 상상을 초월하게 만든다. 또한 도심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대형 건축물 4개를 부수고 1906년 다시 지은 Casa Mila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외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모든 시설에 단독 냉난방장치와 인터폰 시설까지 갖춘 초호화 사무실과 주택 구조였다고 한다. 신앙심이 두터운 그는 그 건물 위에 성모 마리아상을 세우려 하였으나, 당시에 있었던 노동자 폭동을 두려워하던 건축주는 이를 취소하여 가우디와 법정 싸움을 벌였으며, 주인은 결국 패소하여 아름다운 건물 속에서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채 떠났다고 한다. 그 건물은 당시 건축비의 3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게 되었는데, 이는 시가 제정한 건축법을 거의 모두 어겼기 때문에 내려진 벌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UNESCO World Heritage Site로 지정받은 이 건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바르셀로나를 방문하여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린다고 시민들은 말하고 있다.

가우디는 그의 전성기에 두 개의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1884년에 맡게 된 Sagrada Familia(성 가족 교회)는 아직도 건축 중이고, 구엘공원은 1900년부터 시작하여 14년간 정성을 드려 완성하였다. 구엘 공원은 처음에 부자인 구엘이 바르셀로나가 시원히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집을 지어 분양할 계획으로 매입했던 집터였으나 물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집터를 구입하여 집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엘은 계획을 바뀌어 가우디에게 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터는 사실 돌산이었으며, 물이 나질 않는 곳이었다. 가우디의 천재성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어 모든 돌들을 수집하여 아름답게 정원과 다리 등 아름다운 조형물을 만들고, 버려진 타일을 수집하여 시민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타일벤치를 만들었으며, 그곳에 운동장을 만들어 여름에 간헐적으로 퍼붓는 소나기를 모아서 엄청난 물을 수집하여 그곳의 많은 수목에 필요한 충분한 양의 물을 마련하였다. 그곳에는 지금 단 3개의 집이 있다. 구엘의 집과 가우디의 집, 공원으로 조성되기 전에 집터를 구입한 또 한 집이 전부이다.

이곳 역시 UNESCO World Heritage Site로 지정되었으며, 가우디의 집은 교회 모형을 하고 있어, 그의 신앙심을 엿보게 한다. 그는 그곳에서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구엘 공원과 성 가족 교회의 건축 현장과 그 밖의 다른 일들을 둘러보는 것이 반복되는 그의 하루 일과였다고 한다.
1882년 바르셀로나의 서점상이었던 호셉 보카벨라(Josep Bocabella)는 서민들을 위한 교회를 짓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 재산을 바쳐 교회를 건축할 것을 구상하고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빌라에게 교회 건축을 맡기게 되나. 1884년 네오 고딕 양식으로 설계된 도면을 보고 실망한 그는 프로젝트를 다시 당시 31세였던 가우디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는 높이 170m의 가우디의 원대한 구상에 놀랐지만, 신앙심이 두터운 두 사람은 교회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 개인의 재산에 한계가 있었으며, 미망인마저 죽게 되자, 가우디는 교회건축의 짐을 홀로 떠맡게 되었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서 일생동안 벌어들인 그의 재산을 모두 교회건축에 아낌없이 쏟아붓게 되었다. 지금은 UNESCO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지원을 받고 있다. 교회에 대한 전체 구상은 1902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종탑이 18개나 되는 이 어마어마한 교회의 균형을 알기 위해 그는 실과 추로써 교회의 모형을 거꾸로 생각하는 자신의 독특한 방법(Funicular model)을 창안하였다고 한다. 현재 세계에서 제일 높은 교회 건축물은 높이 157m의 쾰른 성당이다. 교회 건축물은 대개 한 개 또는 두 개의 종탑을 갖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바르셀로나 교회는 무려 18개의 종탑을 가지고 있다. (비엔나가 자랑하는 스테판 돔은 높이가 137m이다.) 현재까지 동쪽과 서쪽 벽에 붙어 있는 8개의 종탑이 완성되었으며, 아직도 10개의 종탑이 더 올라가야 한다.

교회의 각 면은 구조와 모양이 모두 다르다. 제일 먼저 완성된 동쪽면의 주제는 예수의 탄생이며, 다음으로 완성된 서쪽면의 주제는 예수의 죽음이다, 각 면은 주제를 나타내는 수많은 조각상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동쪽의 조각상은 고전적인 조각인 반면, 서쪽의 조각은 현대식 조각으로 극한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쪽 면의 주제는 예수의 부활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종탑도 세워지지 않았다. 동쪽과 서쪽과 남쪽의 12개의 종탑은 12사도를 상징하고 있으며, 각 사도의 이름이 새겨지게 되어 있다. 12개 종탑의 높이는 가장자리는 100m, 중앙은 118m로 되어있으며, 북쪽의 중심에 세워지게 될 가장 높은 170m의 예수의 종탑 주변에는 125m의 4 복음서 저자를 나타내는 종탑이 4개 둘러싸이게 된다. 그리고 120m의 성모 마리아 종탑이 더 북쪽에 자리 잡게 되어 있다. 조각은 철저하게 자연물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기둥까지도 큰 나무와 비슷하게 만들었으며, 천정은 흡사 큰 나뭇잎을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으며, 그 사이로 햇빛이 보인다. 공사는 아직도 한창 진행 중이며, 앞으로 정확하게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가우디는 가능한 한 자연물을 상징하는 많은 조각들을 장식으로 넣었기 때문에 기존의 교회가 주는 고딕 양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주는 딱딱함을 배제하고 있으며, 독특한 가우디 양식을 창안하여 곡선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각 면의 디자인도 각각 새로운 조각가들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최종적으로 마무리될지 아무도 정확한 예측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말년의 가우디는 그의 전 재산과 함께 온 정성을 이 교회의 건축에 쏟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외모는 허름한 노인의 모습으로 비쳐지게 되었으며, 매일 건축 중인 교회를 둘러보고 있어도 이 초라한 노인이 그 교회의 설계자인 것을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였다.
철저하게 인간이 기계보다 우위라는 생각에 다가오는 전차에게도 길을 양보하지 않아, 많은 전차 운전자들이 가우디와 대면하기를 꺼려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1926년 6월7일 전차에 치어 쓰러졌다. 초라한 행색에 많은 택시 운전자들이 그를 병원에 태우고 가기를 꺼려했으며, 몇 시간 후에야 빈민 병원으로 그가 실려 가게 되었으며, 다음 날 친구에 의해 그의 신분이 확인 되었다고 한다. 친구가 시설이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을 때, 그는 “나는 이곳 빈민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주장하며 옮겨가기를 거부하였으며, 이틀 후 6월 10일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성 가족 성당의 지하에서 잠들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100년 되는 2026년, 이 교회가 완성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신앙심이 두터웠던 그는 작품 소재를 대부분 자연에서 취하였으며, 직선과 곡선을 아름답게 조화시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성취하였다.
1950-60년대 스페인이 아직 큰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지 못하고 있을 때, 스페인을 먹여 살린 사람이 세 사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예술가였다. 한 사람은 미술가인 피카소였으며, 또 한 사람은 가우디이며, 마지막 한 사람은 음악가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였다고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말하고 있다. 이 세 사람 모두 스페인에서는 국민적 영웅들로 대접을 받고 있다.

안준호/20090505